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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승만 정권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상당히 단순한 평가가 이루어지곤 한다. 삼백산업을 중심으로 소비재 산업을 육성하고, 내수를 지향하는 수입대체 산업화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이 바로 그 것이다. 보통 이러한 평가는 박정희 정권의 수출주도산업화와 비교하기 위한 것으로, 이승만 정권의 '실패한' 수입대체 산업화와 박정희 정권의 성공한 수출주도산업화를 비교하여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이 가졌던 현실적 강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이러한 단순 비교적 인식은 보수 경제학자들 뿐 아니라, 이른바 진보 진영의 경제학자들 역시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이승만 정권의 경제 정책은 단지 박정희식 경제 개발에 대한 찬반 논리에 대한 전사前史로 축소되고 만다.

그러나 정진아는 이 논문을 통하여 이승만 정권이 추구하던 경제정책을 '자립경제론'으로 정리하고, 이승만 정권이 가졌던 문제 의식과 이후 남한 자본주의 경제 건설의 상관 관계를 논증하며 이미 이승만 정권기에 남한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방향이 성립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작업은 이제까지의 한국 경제사가 "박정희 시기의 군부 개발 독재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냐" 라는 좁은 프레임 안에서 진행되었던 것을 넘어서는 의미있는 문제 제기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일부 진보파 경제학 내부에서도 쉽게 빠지게 되는 함정인 '민족자립경제'라는 것이 기원적으로 어떤 문제를 내재하고 있는지 살필 수 있을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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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리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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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의 기본 이데올로기가 '반공'이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 '반공'의 내용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가? 단지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외침이 전부였는가? 오늘날 한국 근현대사를 놓고 '건국'을 중요시하는 뉴라이트 진영과 '민족'을 중요시하는 개혁 진영의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과연 그 것은 실제로 어떤 역사적 실체를 밝히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는가? 후지이 다케시는 이승만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단지 '반공'에 그쳤던 것인지 재조명해보는 이 논문을 통하여 단지 정당 정치적 다툼의 후방 지원에 불과한 오늘 날 한국 현대사 논쟁이 얼마나 텅 빈 것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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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리스티


<네이션과 미학> 1부에 해당하는 '서설 : 네이션과 미학'을 다룬 글입니다. 제가 봤을 때 고진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퍼즐맞추기와도 같은 재미를 주는데 그의 저서들은 어떤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부분에서 변주됩니다. 물론 퍼즐을 맞추려면 퍼즐 조각이 있어야겠죠? 고진의 가장 큰 퍼즐 조각은 칸트와 맑스입니다. 그리고 헤겔, 프로이트와 같은 (상대적으로) 작은 퍼즐 조각들이 있겠죠. 만만치 않은 퍼즐 조각들인데, 고진은 퍼즐을 맞추기에 앞서 먼저 퍼즐 조각들이 어떤 모양인지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그 것이 고진 읽기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싶은데, 칸트와 맑스, 헤겔과 프로이트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고진의) 칸트, 맑스, 헤겔, 프로이트를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괄호에 넣은 '(고진의)'를 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어쨌든 가라타니 고진은 그 누구보다도 친절한 'The Reader - 1차 텍스트 읽어주는 남자'인 셈이고, 그 점이 고진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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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리스티


8. 책임의 네 가지 구별과 근본적 형이상학성


2차 대전 후 독일에서 전후 범죄 처리를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릴 무렵, 칼 야스퍼스는 <죄책론>이라는 강연을 했다. 전후 책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는 많았지만, 결국 그 것이 어떤 '인식'으로 까지 향하지 않았던 일본과 비교해볼 수 있겠다. 아무튼 여기서 야스퍼스는 '전쟁의 죄'를 네 가지 차원으로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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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리스티

<윤리21>은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론을 일본 사회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 논증하는 책이다. <윤리21>의 문제 의식은 이후 <트랜스크리틱>의 1부를 통해서 이론화되는데, <윤리21>의 부록으로 <트랜스크리틱> 1부가 수록되어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미 그 시점에서 <트랜스크리틱> 1부의 골격이 잡혀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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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리스티

슬라보예 지젝,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독서후기. 문강형준님의 포스트에서 '레닌-지젝' 읽기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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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지금의 상황처럼 진보적 개인들에게 있어서 혼란스러운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제 한 몸 챙기기도 바쁜 우리들은, 정치사상적 지형도를 그리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고, 또 그 중에서도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진보적 개인들은 눈 앞에 놓여있는 몇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지 모두가 실질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것은 바로 '혁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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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리스티

“파리는 그야말로 하나의 대양이다. 음파를 발사해보라. 절대로 그 바닥이 어디인지도 모를 것이다. 이 대양을 조사하고 취재해보라! 아무리 빈틈없이 조사하고 취재한들, 이 대양의 탐험가들의 수가 아무리 많고 끈질기다한들, 항상 손닿지 않는 곳이, 알려지지 않은 동굴이, 꽃, 진주, 괴물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문학의 잠수부가 놓친 뭔가 특별한 것이 언제나 있을 것 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

 


“발자크는 정확한 지형적 등고선을 그려 세계의 신화적 정체성을 확고히 세웠다. 파리는 그의 신화가 자라난 곳이다. 두 세명의 거대한 은행가가 사는 파리, 위대한 의사인 오레스 비앙숑을 거느린 파리, 흥행 사인 세자르 비로토를 지닌 파리, 너덧 명의 대단한 매춘부가 있는 파리, 고리대금업자인 고브섹이 있는 파리, 잡다한 변호사와 군인들이 있는 파리가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 또 우리도 거듭 보게 되겠지만 - 이 세계의 형태가 빛을 보게 된 것은 바로 그 거리와 길모퉁이, 그 비좁은 방과 음푹한 구석에서였다. 그런 지형이 이 신화적인 전통의 공간의 평면도라는 것 이외에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달리 무엇이겠는가? 그런 공간에서는 그런 일이 항상 일어나며 또 정말로 세계의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대학 1학년 때 우연히  불문학과 관련된 수업을 하나 듣게 되었습니다. 그 수업을 통해서 이전까지 청소년용 축약본으로만 읽었던 발자크의 소설들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었던 것은 이후 저에게 커다란 지적 자극으로 다가왔습니다. 발자크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혁명기 프랑스의 혼란과 격동, 그리고 자신의 야심과 생존을 위한 작중 인물들의 동물적 몸부림은 저에게 프랑스 근대사에 대한, 특히 파리라는 도시에 대한 커다란 관심으로 이어졌죠. 특히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 장면, 혁명의 혼란 속에서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미친 듯이 재산을 모았지만, 이 재산을 딸들의 영화를 위하여 허망하게 날려버린 채 파리라는 거대한 도시에 삼켜져 버린 고리오 영감의 죽음을 보면서 작중 주인공인 라스티냑이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서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며, “이제 너와 나 둘 사이의 대결이다!”라고 울부짖을 때 느꼈던 묘한 전율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발자크와의 만남을 통해 가지게 된 파리에 대한 관심은 제 전공인 서양사 중에서도 도시사에 대하여 꾸준히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도시 공간에 대한 제 흥미는 또 다시 급진지리학자인 데이비드 하비의 책들을, 그리고 발터 벤야민의 아이디어를 만나게 되는 과정으로 이어지게 되었죠. 마침 이번에 나들이 다녀오면서 발자크의 책들도 읽었겠다, 해서 근대 도시 파리에 대한 동경을 묶어 벤야민과 하비의 아이디어를 빌린 잡글을 한번 늘어놓아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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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리스티

'다윈'이나 '진화'는 인문계 고등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문돌이'였던 저에게 정말 먼나라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으로 태어난 저 자신과 역사적인 현실 기독교 사이의 갈등은 저에게 결국 리처드 도킨스의 무신론적 저서들을 접하게 했고, 그 책들은 저를 무신론자로 개종시키지는 못했지만 '불 같은 도킨스의 세례'로 저에게 진화생물학에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이 가설이 아닌 과학적 상식이 된지 오래인 지금이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부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해묵은 지식을 어렴풋이 떠올릴 뿐이구요. 특히 과학에 대한 관심이 다른 어느 나라 보다 '실용'적인 것에 국한된 한국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이 더한 것 같다- 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이구요, 아무튼 오늘은 최근에 나온 진화생물학에 대한 좋은 대중 교양서를 소개할까 해서 이렇게 키보드를 두들겨보게 되었습니다.

 교양서 베스트셀러 순위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장대익 교수의 [다윈의 식탁]이 바로 그 책인데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잘 알지 못하는 바로 그 '진화론'에 대한 논쟁거리들을 모두 다 모아놓은 책입니다. 그렇다고 딱딱하고 재미없는 학술 서적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길. 이 책은 "다윈 이후 최고의 진화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 박사의 장례식을 계기로 한 자리에 모인 우리 시대의 지성들, 특히 그 유명한 [이기적인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와 언제나 그의 이론에 대립각을 세우며 위대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해 온 하버드대학의 스티븐 제이 굴드 박사가 일주일 동안 대면 토론을 벌인다는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각각 도킨스 팀과 굴드 팀으로 나누어진 양측 토론자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 도킨스 팀 - [통섭]의 에드워드 윌슨, 언어 심리학의 거장 스티븐 핑커, 호혜성 이론의 창설자 트리버즈, 진화이론의 '근대적 종합'의 한 주역이었던 에른스트 마이어 등
   굴드 팀 - 하버드의 대표적인 진화유전학자 리처드 르원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우리 시대의 지성 노엄 촘스키, 집단선택론의 새로운 주창자 엘리엇 소버 등

진화생물학에 대해 살짝이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일주일이라는 대토론회를 벌였다는 사실에 대해 경악과 함께 "아니, 난 그런 토론회 따윈 들어본적 없다구?!"라고 당황해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시길. 이러한 토론이 벌어졌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장대익 교수의 픽션일 뿐입니다. 장대익 교수 역시 이 대토론회의 서기 역을 맡았다는 설정, 그리고 본인의 코멘트를 통해 토론을 정리하면서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고 있기도 하구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 토론의 발언들은 토론의 가상 참여자들이 책이나 인터뷰 등에서 분명히 이야기한 사실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믿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적응, 협동, 진보, 선택, 종교 등 진화생물학의 각 분야에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제거리들에 대해 참가자 개개인의 학술적인 대립 뿐 아니라 사적인 감정들마저도 여실히 드러나는(!) 대논쟁이 펼쳐지는데 어찌 재미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 토론회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대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강간도 적응인가? -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 그 모든 것은 과연 자연 환경에 적응한 결과인 것일까?

이기적인 유전자로 테레사 수녀를 설명할 수 있나? - 협동이라는 현상을 통해 보았을 때, 자연 선택은 과연 유전자에만 작용하는 것인가? 집단적 수준에서 자연 선택이 이루어지진 않을 것인가?

유전자에 관한 진실을 찾아서 - 유전자의 정의는 과연 무엇이고, 과연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인가? 유전자와 환경의 영향력 중 무엇이 우세한가?

진화는 100m 경주인가, 넓이뛰기인가? - 진화는 천천히 점진적으로 일어날까? 아니면 일정한 시기에 도약하듯이 진행되는 것인가?

박테리아에서 아인슈타인까지 - 진화는 과연 진보와 동의어인가? 과학은 과연 객관적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일 뿐인가, 아니면 사회에 의해 구성되는 것인가?


이러한 대주제들을 걸쳐놓고 양 측의 토론자들이 펼치는 진검대결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굴드와 도킨즈의 '전설적인 대립'을 확인한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재미있구요. 장대익 교수는 특히 굴드와 도킨즈에 대해서는 특별히 페이지를 할애하여 어쩌면 근시일 내에 과학 위인전에 등장할지 모를 현대 과학사의 두 중요한 인물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줍니다. 생물학에 약한 초보자들 - 예를 들어 저와 같은 - 도 쉽게 토론을 따라갈 수 있도록 적절한 용어 설명과 친절히 관련 서적 소개까지 이루어지고 있구요.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전형적인 '문돌이'인 제가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하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 책은 진화생물학, 특히 도킨즈의 관점에서 본 '종교'에 대한 메시지를 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특별히 [만들어진 신]이나 기타 도킨즈의 글들을 통해 그의 종교관을 확인할 필요 없이 이 책 하나면 간단히 종교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둘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책은 과학과 사회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비판적 사고의 단초를 제공해줍니다. 특히 다윈의 진화론과 진화론이 지지받았던 당시 영국 사회 분위기에 대한 굴드의 이야기는 '과학적 진실'을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작금의 현대 사회에 대해 따끔한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유전자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 간략하고 알기 쉽게 정리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과학 교과서의 서술적이고 기능적인 설명과 다르게, 유전자에 대한 정의가 각각의 학자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며 그 역할과 기능도 理論에 따라 異論이 많다는 사실, 그리고 유전자결정주의 / 유전자환원주의라는 '위험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보도 알려줍니다.

이러한 책의 장점들은 과학에 큰 관심이 없는 우리가 쉽게 엘리트주의적 과학에 의해 속아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우리가 '앉아서 당하지 않도록' 시민적 상식을 키워준다는 점에서 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황우석 사태'나 과학윤리와 관련되어 논쟁이 되고 있는 여러 가지 법안들 - 안락사 / 인간 복제 / 인체 연구 수준의 제한 등 - 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언론플레이에 넘어가게 되는 일이 없도록 '더 깊고 넓은 시민적 상식'을 주장해온 저에게 [다윈의 식탁]처럼 쉽고 재미있으면서 어느 한 쪽의 편에 서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보여주는 책은 치명적으로 마음에 드는 책입니다.

마지막으로 [통섭]의 역자로서의 능력 뿐만 아니라 교양서 저술가로서도 훌륭한 능력을 보여준 장대익 교수에게 감사하면서, '문돌이'로서 제 자신의 공부들, 예컨대 역사 / 사회학 / 정치학 / 철학 / 경제학의 제영역에서 진화생물학의 성과들을 어느 정도 접목시킬 수 있을지 좀 더 고민해보아야 겠습니다. '다학제간 연구', '통섭' 등의 개념들이 지금처럼 일정 부분 공허한 울림이 아닌 실천적인 목소리로 공부에 쓰일 수 있도록 말이지요.

Posted by 프리스티



김민하의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는 일전에 이야기한 바 있는 한윤형의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와 함께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시리즈로 나온 책입니다. 저자 김민하는 덤프연대, 민노당, 진보신당 상근자로 일하다가 현재 공익근무요원을 하고 있는 20대 후반 청년이구요. 저는 삼사년 전에 우연히 그의 홈페이지를 발견하고 가끔 눈팅하곤 했는데,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명민한 분석력과 폭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책이 나왔길래 주저 없이 질렀죠.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시리즈는 '젊은이들의 자서전'을 주제로 출판되고 있는 시리즈입니다. 현재 10권까지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는 3권인 한윤형과 8권인 김민하, 이렇게 두 권을 읽었습니다. 따로 정해진 형식은 없는 것으로 보이고,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적는 시리즈인 것 같은데, 한윤형의 책이 상대적으로 자신의 이야기 보다는 관찰자의 시각으로 2000~2009년의 인터넷 정치 담론사를 기록하고 있다면, 김민하의 책은 담담하게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면서 젊은 활동가로서의 경험을 솔직한 태도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목이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인 이유는 저자 김민하가 레닌과 같은 혁명가가 되길 꿈꾸는 오타쿠이기 때문입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레닌 이야기가 많이 나오거나, 오타쿠적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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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리스티


 - 문광부 우수 학술 도서 중 하나입니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라는 오카다 히데키 교수가 쓴 책을 번역한 것인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인명을 한국어 독음으로 쓰지 않고 한자로만 표기한 것입니다. 가뜩이나 만주국 문학이라면 익숙하지 않은 차에 山丁, 古丁 등 만주인 작가 이름과 처음 보는 일본인 작가 이름이 나오니 중국어도 일본어도 잘 알지 못하는 저에게 이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좋은 책이고, 번역도 전반적으로 훌륭한 것 같지만 딱 하나 아쉬운 점이네요.

 어쨌든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보통 만주국과 문학이라는 소재에 대해서는 나츠메 소세키 같은 일본 유수의 문인들이 남긴 만주 기행문에 대한 분석이나, 일제 식민기에 만주 지역에서 작품을 남긴 항일 문인들에 대한 연구들은 익숙한 것이지만, 정작 만주국 체제 내에서 문학 활동을 했던 작가들에 대한 책은 거의 처음 접해본 듯 합니다. 중국에서는 만주국을 僞 만주국이라고 부르면서, 가짜 국가로 취급하기 때문에 만주국의 어용 작가는 물론, 만주국 내에서 체제에 은근히 반대하는 작품을 써낸 작가들까지도 친일 작가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만주국, 만주문학에 대한 연구는 굉장히 단순한 논리 - 제국주의 파쇼 문학으로 몰아 붙이는 - 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구요. 한국에서도 중국 근현대 문학이라 하면 루쉰을 비롯한 '대륙' 작가들이나 대만 작가들, 아니면 근래의 현대 문학을 연구하지 만주국 문학은 아예 '변방'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식민 지배국이자, 가해자 입장에 있었던 일본에서 오히려 이러한 연구서가 나온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져있고, 마지막에 흥미로운 부록들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1부는 만주국의 문학에 대해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는데, 특히 재만 일본 작가들의 작품들과 국가적인 문예 정책의 시행 과정, 그리고 이에 대한 중국인 작가들의 반응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름 만주국에 대한 책을 여럿 찾아본 편이라 생각해왔지만 저 스스로에게 아주 민망하게도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특히 재만 일본지식인들 사이에서 따롄 이데올로기와 신징 이데올로기의 대립 과정을 이렇게나 상세히 엿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였던 것 같습니다. 다롄은 만주국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만주 지역에 진출해 있던 일본인들이 정치경제문화적 거점을 두고 있던 도시입니다. 만주 사변이 일어나게 된 계기를 마련한 곳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만주국이 건설되면서 만주 지역의 중심지는 만주국의 수도인 신징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신 국가 건설이라는 정치적 에너지는 신징에서 집중적으로 표출되게 되지요.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각각 다롄 이데올로기와 신징 이데올로기라는 이념적 차이로 나타납니다. 다롄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생기를 잃어버린,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것이라면 신징 이데올로기는 만주국의 건국 이상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려는 맹목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롄 거주 일본인과 신징 거주 일본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는 만주국 내 일본 지식인들에게서도 그대로 전이되는 양상을 보이구요. 이 것은 재만 일본 문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문학에 있어서 다롄 이데올로기는 순수문학주의의 제창으로, 신징 이데올로기는 실천문학주의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두 입장은 '만주 문학의 독자성'을 둘러싼 논의에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만주 문학을 일본문학의 연장이나, 하나의 일본 지방 문학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일본에서 독립한 새로운 독자적 문학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독자성' 논의라 할 수 있는데, 다롄, 신징 모두 이러한 '독자성'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에는 동의하고 있지만 이러한 독자성이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되어야 하느냐를 두고 갈등하게 됩니다.

 다롄의 입장에서 독자적인 만주문학이란, 만주에 거주하는 다양한 민족들이 각각 자신의 문학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만주국의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는 문학입니다. 따라서 제민족이 어떤 정치성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생활에서 우러난 문학을 써낼 때야 말로 진정한 '만주문학의 독자성'이 생길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신징의 입장에서 독자적 만주문학이란, 일단 만주국의 건국이념을 따르는, 새롭게 건설되는 문학입니다. 이 것은 만주국 건국에 영향을 끼친 정치철학, 그러니까 세기말적 번뇌와 발전의 한계에 부딪힌 근대를 '초극'하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에서 이러한 '근대의 초극' 시도는 결국 전쟁 상황과 맞물려 천황제 파시즘 / 전시 동원 체제로 마무리되는데, 신징 이데올로기 역시 역사적으로 마찬가지의 방향으로 흐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여러 차례 '근대의 초극'과 문학 사이의 관계를 지적한 바 있는데, 그러한 지적에서 우리는 '자본=스테이트'의 시대적 상황을 뛰어넘기 위해 많은 문인들이 '네이션'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광신적 내셔널리즘으로 흐르고, 그 것이 아시아주의와 맞물려 중국인 작가들에게도 강요되었던 것이 만주국 문학의 비극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부는 만주문학계에서 활동했던 주요작가들에 대한 연구입니다. 대표적 계몽주의자이며, 친일문학가로 악명을떨친 古丁, 향토문학을 제창하고 만주국의 구조적 수탈을 폭로하며 은연 중 항일 정신을 담은 작품들을 써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중공 수립 이후 친일 문학자로 몰리게 되었던 山丁, 만주국의 검열에 맞서 다양한 표현 기교로 항일/반제 문학을 써낸 王秋營, 사회주의 항일문학의 요람 하얼빈 문단 등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개개 작가들이 한국에 그리 잘 알려진 것이 아니라 영 따라가기 심심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검열에 맞서는 만주 작가들의 표현 기교는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어서 한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주국 중국인 문학에는 몇 가지 반복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먼저, 중국인 작가들은 작품 속에서 일본인들을 잘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일본인 작가들이 의식적으로 중국인들을 주인공으로, 또 중국인의 생활을 그려내는 것으로 '만주 문학의 독자성'을 이룩하려고 했떤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데, 작중에 일본인을 등장시키면 인물을 묘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작가의 대 일본 인식을 드러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죠. 중국인 작가들은 일본인들을 등장시키지 않으면서도, 어떤 인물이 일본인임을 암시하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를 사용했다", "근방에서 자주 볼 수 없는 옷을 입고". "금니를 박아넣고 수염을 기른", "그는 외국인처럼 보였다" 등, '외국인=일본인'임을 암시하는 수법이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두번째로, 작품에 유난히 강간 당한 여성, 그리고 이에 대한 복수극의 모티브가 많이 등장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는 '여성=중국'을 연상시켜 자연스럽게 항일 정신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 것은 비단 만주국 문학 뿐 아니라 식민지 경험이 있는 국가라면 유사하게 등장하는 모티브라고 생각되는군요. 셋째로, 복수를 끝마친, 또는 어떤 사건으로 몰락해버린 사람들이 작품의 마지막에 어디론가 "떠나는" 장면으로 결말짓는 작품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것은 체제에 저항하는 비적이 되러 간다는, 혹은 혁명의 길로 떠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더 구체적으로 '서북' 지역으로 떠난다는 표현은, 당시 만주국 서북 지역에 수립된 홍군의 해방구를 암시하던 것이구요. 이러한 구조적 특징 뿐 아니라 연재 작품과 단행본 사이에 개작이 자주 이루어진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한데, 이 것은 단행본의 경우 100% 검열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연재본에서는 작가의 진의를 담아낸 표현을 쓰고, 단행본에서는 이러한 표현을 순화시키거나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만주국 문학은, 정말로 검열에 맞선 작가들의 진검 승부가 펼쳐졌던 장이였다고 할 수 있겠죠.

 이러한 표현 기법 뿐 아니라, 만주국에 널리 침투된 일본어에 대한 작가들의 대응도 특기할만 합니다. 당시 일상적으로
쓰였던 말이 '협화어'였는데, 이 것은 피진어의 한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일본어와 중국어를 섞어서, 또 그 나름의 문법을 만들고 의미를 창출한 언어였는데, 여기에 맞서 순수한 중국어를 사용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것을 주장한 작가도 있을 뿐 아니라, 같은 발음을 가진 협화어 단어를 일부러 사용하여 반일적인 표현을 중의적으로 나타내는 기법을 사용한 작가들도 잇었으며, 협화어라는 새로운 언어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일종의 언어 실험을 시도한 작가도 있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만주국에 일본어 검정시험과 중국어 검정시험이 국가적으로 실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인데, 이를테면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일본어 구사가 필수 였고, 일반 기업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워낙 다양한 민족이 많은 만주국 특성상 중국어 검정을 통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중국어 검정시험에 응시한 사람중 많은 수가 식민지 조선인과 식민지 대만이었다는 사실은 동아시아의 슬픈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네요..

 

 책의 3부는 일본과 중국이라는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본 '만주국 문학'에 대한 연구입니다. 1942년 부터 3년에 걸쳐 일본제국은 '대동아문학자대회'라는 것을 열게 됩니다. 일본이 대외적으로 내세웠던 대동아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문학대회라 할 수 있겠죠. 1,2회는 도쿄에서 열렸고, 3회는 중국 난징에서 열렸스빈다. 이때 일본과 중국쪽 참가자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문학적 언설을 펼쳤다고 하는데, 유독 만주국 참가자들은 굉장히 판에 박힌 말들을, 이를테면 문학을 통한 대동아의 근본 이념의 실현, 필승의 신념으로 문학적 선전에 나서야 한다, 등의 연설을 펼쳤다고 합니다. 굉장히 교과서적인, 개성없는 체제의 모범답안을 내세운 셈이죠. 앞서 잠간 얘기한 친일문학자 古丁이 그 대표적 논자였구요.

 이러한 '모범답안 제출'에 대해 필자는 당시 대동아공영권과 만주국의 관계를 통해 그 해답을 찾습니다. 대동아공영권의 중추국가들은 이른바 '일만화', 곧 일본, 만주국, 중화민국이였습니다. 이미 조선과 대만은 일본에 포함된 것으로 인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죠. 그러나 중화민국은 사실 대륙에서 충칭 국민당 정부, 옌안 공산당 정권과 혼전을 빚고 있었기 때문에, 중화민국 인민들이 '대동아'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일본인 문학자들은 어차피 대동아공영권의 리더인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아시아의 단합을 목적으로 한 '대동아공영'을 선전하기 마땅한 입장이 아니었구요. 자연스레 만주국 대표로 나온 중국인 古丁이나, 또 백계 러시아인 만주 문학자 등이 대동아이념을 선전하기 가장 좋은 케이스였다 할 수 있겠죠. 이러한 정치적 이유로 참가하게 된 만주국 문인들은 문학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국책에 맞는 발언을 하기를 요구받았습니다. 이 것은 일본의 정치적 노예로 이용되어야 했던 만주국의 현실이자, 또 그 꼭두각시 역할으 해야했던 중국인 작가들의 현실을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대표적인 친일문학자로 악명 높은 古丁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이러한 고민은 우리에게 친일문학자로 각인되어있는 인물들, 예를 들어 춘원 이광수 같은 사람들을 볼 때도 필요한 자세인 것 같구요.

 이 책은 2부에서 古丁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상당한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古丁은 베이증대학출신으로, 만주국 관료를 역임하면서 문학 작품을 써낸 작가입니다. 그는 대표적인 만주 중국인 문인으로 일본까지 소개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작가였습니다. 일본어에도 능통해, 만주국을 방문하는 일본 문화인들과도 두루 교류가 있었으며, 만주국 문화행정에도 깊이 관련하고 있던 인물입니다. 그는 '사인주의'(많이 쓰고 많이 출판하여 문학의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를 내세워, 일본인의 자금을 빌려 출판 작업을 펼치고, 또 만주국의 문화행정에 협력한 친일파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古丁은 젊은 시절 사회주의 문학활동을 펼친 좌파 지식인 출신입니다. 베이징대 학생 시절, 그는 좌익 문학 활동을 벌이다 체포 당했고, 그후 변절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 古丁은 수년간 은둔하다가, 그의 고향인 만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만주 문단의 황폐함에 놀라게 되죠. 당시 베이징 문단은 5.4 운동 이후 구문학을 축출하고 리얼리즘적인 신문학을 들여온 상태였지만, 문화적 불모지였던 만주에서는 여전히 통속적인 구문학이 번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古丁은 자신의 고향인 만주가 이토록 문화적으로 낙후된 것에 충격을 받고, '사인주의'의 방향으로 자신의 문학 활동을 변경합니다. 古丁의 이러한 활동은 불과 5~6년 만에 만주 문단의 주축을 신문학으로 발전시킬 정도로 왕성했던 것이지요. 그가 만주국에 협력하면서까지 자신의 '사인주의'를 밀고 나갔던 것은, 만주 인민의 계몽을 위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만주의 상황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국가의 영속성'을 믿을 만큼 순진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古丁은 평생을 살면서 "국가가 세번이나 변하고, 지폐가 다섯 차례나 변한' 어지러운 만주에 있었습니다. 친일 문학 관료로 활동하면서도, 일본인들에게 "나는 일본이 만주국을 번성시키고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훗날 일본이 이 곳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된다면 설사 일본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이 시설 모두를 가지고 돌아갈 수는 없겠지요."라고 속내를 드러낸적도 있었죠. 그를 단지 "친일파"라고 부를 수 밖에 없을까요? 그는 단지 혼란스러운 자신의 고향 만주를 조금이라도 비참함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싶어했던 이는 아니었을까요?

 물론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친일의 꼬리표를 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특히 친일문제가 유난히 감정적으로 다뤄지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문제이구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너무나 쉽게 '친일파'라는 이름을 붙이기 이전에,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체제에 협력한 이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의도했던 이를 구분하여,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복원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것은 우리가 동아시아 전체의 근현대사를 압축하고 있는 '만주국'이라는 특정 주제를 통하여 고민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Posted by 프리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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