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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시니스트 140호 시사인 만화 - http://homa.egloos.com/4396640

 최근 5.18 과 관련하여 굽시니스트가 그린 시사인 만화와, 그에 대한 반응들을 읽고 이전부터 생각해왔던 '한국 20대의 정치적 감수성 형성에 영향을 준 90년대~2000년대 대중문화'에 대해 첫번째 실마리를 발견한 것 같다. 굽시니스트는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을 패러디해 80년 5월 17일 신군부 쿠데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은하영웅전설>이라는 작품은 단순히 패러디의 대상일 뿐 아니라 20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을 건드리는 소품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은하영웅전설>이라는 텍스트는 90년대 후반 부터 2000년대 전반까지 젊은 세대들에게 광범위한 인기를 누렸던 우주전쟁을 다룬 대하 SF 소설일 뿐 아니라 - 물론 <은하영웅전설>을 SF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고, 나 역시 거기에 동의하지만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일단 SF로 쓴다. - 민주화 이후에도 무력함을 벗어나지 못한 한국 정치에 대한 냉소와 실망에 대한 모종의 대체물로 기능하지 않았나 싶다. <은하영웅전설>의 독자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전제군주 라인하르트나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자 양 웬리, 둘 중 누구를 지지하는가를 떠나서 이러한 '위인'들의 모습을 통해 박제화 되지 않은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고, 그것에 대한 나름의 가치판단을 내리게 되지 않았을까.

얼마 전 이글루스에서는 <은하영웅전설>의 양 웬리와 '애국'의 문제를 두고 상당히 흥미로운 글들이 많이 나왔는데

http://madsyntst.egloos.com/4377808 

http://nestofpnix.egloos.com/4377845

http://sinzy21.egloos.com/3236686

 재미있던 것은 양 웬리라는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를 떠나서 <은하영웅전설>을 통해서 (소박하게나마) 자신의 정치관을 확립했다는 증언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나 같은 경우도 어찌 보면 <은하영웅전설>의 영향을 많이 받은 편에 속했고.. 우리 세대의 <은하영웅전설> 독자들이 양 웬리가 내뱉는 '민주주의'에 대한 명언들(?)을 어떻게 자기화시켰는지, 또 그것을 논리화시켰는지는 각자 다르겠지만 적어도 정치적 감수성의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옹호하게 된 것은 동일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자신의 경험과 동떨어져있는 교과서적 설명이나 민주화 투쟁의 역사들 보다도 <은하영웅전설>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더욱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최근 <일본인의 전쟁관>이라는 책을 세미나에서 읽으면서 <전쟁기록물>이 일본인들의 전쟁관과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살짝 알아볼 수 있었는데, 같은 형식으로 <은하영웅전설>과 같은 작품이 우리 세대의 민주주의관과 어느 정도 관련성을 가지고 있을지 연구를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은하영웅전설>이 한때 대학 도서관 대출 순위의 선두를 달렸던 것은 아닐 것이다. 좀 시간이 생긴다면, <은하영웅전설>을 다시 읽어보며 이러한 것을 점검해 볼 기회를 가져야겠다. 혹시 이러한 작업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있다면 연락 주시길.. ㅎㅎ

Posted by 프리스티


 시험 끝났다고 해서 뭐 딱히 새로운 놀 거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고 그냥 남는 시간에 만화책을 들여다 보는 것이 행복할 뿐이다.

 Beck (완결) - 드디어 완결을 봤다. 중학교 때 처음 접한 만화인 것 같은데 이제야 완결권을 보다니.. 공연 장면이 나올 때마다 머릿 속에 유키오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것 같다...라고 쓰면 솔직히 거짓말이고, 어쨌든 뭔가 멜로디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듯한 그런 착각이 들 때가 있음. Devil's Way 같은 곡은 누가 만들어서 내보내줬으면 한다. Moon on the water 정도로만 나와도 정말 흡족할 것 같음.

 오란 고교 호스트부 (~14권)- 오랜만에 다시 들여다본 만화책. 정말 즐겁고 정신없는 에피소드들의 나열이지만 갈수록 러브 라인이 강화되면서 진지한 에피소드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갈등 관계를 한 에피소드 안에서 해결해버리기 때문에 팬 입장에서는 안심하고 고민 없이 계속해서 읽어나갈 수 있는 만화가 아닐까 싶음. 대신 그만큼 이야기가 루즈해지기 쉽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롭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추가시키거나, 혹은 기존 캐릭터의 갱신을 필요로 해야할 것 같은데 전자는 처참하게 실패한 것 같고, 후자는 쌍둥이를 분리 시키면서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음. 이 만화는 기본적으로 여성 캐릭터가 한 명 정도 더 붙을 필요가 있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스쿨럼블 (~19권) - 한때 정말 배꼽을 잡고 봤던 만화인데 10권 중반대에 들어서 힘이 빠지기 시작한 작품.. 애니메이션화와 함께 한국을 강타한 만화였지만 이제는 그 존재마저 희미해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22권으로 완결이 나왔다는데 읽다 읽다 지쳐서 다음 권을 읽을지 말지.. 항상 똑같은 개그 패턴에다가 러브라인 역시 오해와 오해의 연속으로 풀어나가다 보니 초반의 신선함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개인적으로 가장 즐겁게 읽던 부분은 야가미 교내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었나 싶음..

 신만이 아는 세계 (~5권) - 최근 읽은 작품 중에서 바쿠만! 과 함께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 갸루게를 본격적으로 작품 소재로 사용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상당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일본 대중의 오타쿠화가 진행되었는지 드러내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 어쨌든 일종의 퇴마(?)물이면서 '연애'를 수단으로 한다는 점, 게다가 주인공이 미연시를 통해 작업 스킬을 익혔다는 것 등 재미있는 설정에다가 전형적인 캐릭터들을 한번 더 꼬아서 참신한 전개를 보여준다는 것이 상당히 즐거운 만화인듯..

 플루토 (완결) -  진짜 다시 읽으면서 눈물나는 장면이 너무 많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ㅠㅠ 2권 마지막 장면은 정말ㅠㅠ 우라사와 나오키의 연출은 언제 봐도 정말 감탄스럽다. 다만 <몬스터> 때부터 지적되는 서스펜스의 과잉이 이번에도 여전히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아쉬운 부분. <마스터 키튼>처럼 에피소드의 연속으로 서사 방법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익숙한 작품을 낯선 방식으로 그려내면서도 원작의 메시지를 훼손하지 않는 것은 정말 존경스러움. 이러한 만화를 볼 때 마다 일본인들의 '전후 감각'이 아직 완전히 망각되지는 않았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요츠바랑 (~9권) - 이 만화는 점차 만화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나가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만화보다는 드라마에 가까운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별다른 갈등없이도 이렇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 물론 치유계 만화들 역시 갈등이 없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지만.. 요츠바의 표정에 드러난 세상은 너무나 놀랍고 유쾌해서 나 역시 기분이 좋아진다..

 크로스게임 (~16권) - 역시 아다치 할배는 야구 + 삼각 관계를 그릴 때 가장 훌륭하다. 여전한 완급 조절에 감탄 또 감탄. 물론 H2의 미칠듯한 컷 구성과 작렬하는 대사 센스에는 못 미치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 라는 느낌이랄까..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정통파 아다치 작품에서는 메인 히로인이 되어야 할 와카바가 미리 죽어있는 상태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일텐데, 이게 완전한 반칙이면서도 계속해서 극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기도 하는 듯.. 빨리 완결을 보고 싶은 작품 중 하나.
Posted by 프리스티


새움 근동이물 세미나 발제용.


* 김영미, 『그들의 새마을운동』중 1부, 2부. 푸른역사 , 2009.

 

 

목차

 

책머리에 | 민중들의 생활세계와 경험세계를 찾아

1부. 그들과 나의 만남

2부. 어느 ‘자립마을’의 내면 풍경

1장. 마을로 들어가며

2장. ‘노구장’과 식민지 근대화의 경험

3장. 또 하나의 조사지, 경험의 차이

4장. 해방에서 전쟁까지 : ‘외풍’과 마을공동체의 변화

5장. 1950년대 : 자율적 마을공동체, 정미조합의 결성

6장 1960년대 : 마을권력의 세대 교체와 청년 이장

7장 1970년대 : 새마을운동의 내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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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리스티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에서 철학적 이성인식으로 이행"이라는 절 제목은 무엇을 뜻하는가?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세 개의 절로 이루어져있다. 1절,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에서 철학적 이성인식으로의 이행. 2절, 철학적 이성인식으로부터 윤리 형이상학으로의 이행. 3절, 윤리 형이상학으로부터 실천 이성 비판으로의 이행.이 바로 그것이다.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에서 철학적 이성인식을 거쳐, 윤리 형이상학으로 향했다가 실천 이성 비판으로까지 향하는 철학적 노정이 그려지고 있다. 제1절인,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에서 철학적 이성인식으로 이행"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윤리'라는 단어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서 부터 철학적으로 '윤리'의 개념을 다잡는 첫걸음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윤리'라고 했을 때 그 것은 보통 선악의 문제로 여겨진다. 그 선악을 구별하는 것이 공동체적 규범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윤리라는 것을 공동체 규범을 내면화 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다른 한 편에서는 윤리적인 것을 '선한 것'으로 보고, 그 선을 행복의 실현으로 보는 공리주의적 시각이 있다. 이 두 가지 시각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윤리'라고 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고, 칸트가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이라고 할 때는 이 두 가지 시각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 두 가지 시각을 비판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만의 독특한 '윤리형이상학'을 펼쳐낸다. 그 것은 엄격하고 때로는 잔혹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철저한 '윤리'이다. 전혀 그렇지 않게 느껴지는 문체로, 칸트는 그만의 엄혹한 윤리를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엄혹한 윤리는 이성을 지닌 인간이 정말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며, 반대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칸트는 먼저 '선의지'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칸트가 말하는 '선의지'는 일단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어떠한 제약도 없이 유일무이하게 '선'하다고 가정된 것이다. 이러한 '선의지'는 개인이 속한 공동체에서 떠받들여지는 가치들, 권력이나 부, 명예와 건강의 획득과 무관하며, 심지어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것과도 무관한 것이다. '선의지'는 어떤 결과를 낳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의지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다. 이 선의지는 생명을 보존하고 번식하는 인간의 본능과도 무관한 것으로, 심지어 선의지가 자신의 본능과 배치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선의지에 따라 행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선의지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칸트는 선의지를 '의무'라 말한다. 선의지는 그 것이 낳을 결과 때문에 나를 촉발시키는 어떤 경향성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나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법칙'이다. 그 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든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이성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이성은 생명의 본능적인 만족이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행복과는 무관한 선의지를 위해 주어진 것이다. "곧, 이성은 이런 일이 설령 경향성의 목적들에 대한 수많은 손실과 결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성만이 규정하는 목적(*선의지의 실현)을 실현함으로써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선의지는 인간이 인간답기 위한 '의무'로 주어지는 것인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선의지를 실현하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해야하는 것이지 "마침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면서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은 참된 윤리적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선의지를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한다고 할 때 그 것은 우리가 무언가 한다고 해서, 또 안한다고 해서 우리가 득을 보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감사인사를 받기 위한 것은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것을 해야한다는 것이 칸트의 윤리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고, 따라서 선의지에 따른 윤리를 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자신의 윤리적 요청이 현실적 행복이나 이해에 배치되어,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이 일상적으로는 고통과 괴로움을 낳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성은, 그때 경향성들에게는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은 채, 단호하게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 매우 강렬하고 그렇기에 매우 정당해보이는 요구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서, 그의 훈계를 지시명령한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졌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윤리적 요청과 (그 자신에게) 매우 정당해보이는 요구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간의 처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인 것이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평범한 인간이성은 사변의 어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천적 근거들에 채근 받아, 자기의 권역에서 벗어나와 실천 철학의 분야 안으로 내딛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윤리적으로 살기 위해서 철학적 인식이 필요하고, 또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Posted by 프리스티


 가라타니 고진을 통해 이름만 익히 알아온 다케우치 요시미의 책인 <일본과 아시아>를 읽었다. 책을 읽다보니 가라타니 고진이 <역사의 반복>에서 보여주고 있는 '아시아주의'에 대한 이해는 상당 부분 다케우치 요시미의 아이디어를 통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그 뿐 아니라 심지어 평론의 서술 스타일 마저도 상당히 흡사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튀어나온 것이 어쨌든 일본 근현대 사상사의 전통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고진이 <네이션과 미학>에서 강조하고 있는 오카쿠라 텐신 등도 이미 다케우치 요시미가 먼저 주목한 인물이다. 아무튼 다케우치 요시미 읽기를 통해서 <역사와 반복>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잡문 형식을 빌린 글 중에서 1880년대의 아시아주의자로, 이른바 '동아선각지사' 중 1인으로 불리우는 <대동합방론>의 저자 타루이 토오키치에 대해서 재미있는 언급을 발견해서 기록해둔다. 타루이 토오키치는 상인의 아들로, 세이난 전쟁 때 그 것에 호응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 흔히 이야기하듯 정한론을 주창하고 세이난 전쟁의 주역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아시아주의에서의 위치를 주목해둘 필요가 있다. 타루이 토오키치 뿐 아니라 초창기 '아시아주의자'들 부터 1940년대 '대동아주의자'들까지 어떤 형태로든 일관적으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추종하고 있다는 점.


 타루이 토오키치는 이후 "사회평등과 공중최대복리"를 강령으로 하는 동양사회당을 결성하나 - 민권주의적 성격 -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이즈음 조선에서는 우리가 잘 알듯 갑신정변이 일어나는데, 당시 갑신정변은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에게 큰 지지를 받고 있었다. 타루이 토오키치 역시 이에 감복해 청, 한을 향한 뜻을 품게 된다. 이후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주저치 않고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향했고, 중국 복주 주둔 육군 장교와 의기투합하여 거사 계획을 세우거나 상하이에서 이후 중국 경략에 큰 역할을 점하는 동양학관 설립에 참여하기도 한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갑신정변에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해온 김옥균과 왕래하면서 대표적인 아시아주의 민간 정치 단체인 현양사 인사들과 협력해 김옥균의 재기를 추진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일본과 조선을 대등한 입장에서 "대동국"이라는 이름으로 연방제로 결합시키는 것이 동아시아 정세를 위한 최상책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대동합방론>을 써낸다. 그는 서술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책의 전문을 한문으로 써냈는데, 이는 조선에 이 책을 읽혀야 한다는 의식으로 보인다.


 이후 흑룡회의 보스격이였던 우치다 료오헤이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 정치 시절에 조선으로 건너와, 동학당의 후신이었던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고문이 된다. 이때 우치다와 이용구가 투합할 수 있었던 것은 타루이 토오키치의 <대동합방론>에 대해 두 인사가 합의를 이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흔히 이용구를 단순한 친일파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용구는 어디까지나 대동합방의 대의를, 대등한 합방을 조건으로 우치다와 협력해, 한일합방청원 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용구의 순진한 기대는 이토 히로부미라는 현실 정치인에게 배신 당했고, 이용구는 작위를 거부하고 얼마 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우치다 료오헤이는 비록 이토 히로부미 휘하에서 침략의 제일선에 서있었지만 이용구와 조선농민에 대한 배신에 책임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일한합방기념비를 세우는데, 여기에 제일주역인 이완용의 이름을 지우고 이용구의 이름을 새겨넣었다는 것이 특기할만 하다. 이용구의 아들 이석규는 다이토오 쿠니오라는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한자로 大東國男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동합방론>을 아시아주의의 '소박한 원류'로 평가하고자 하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견해로, 실제로 흔히 친일파로 잘 알려진 이용구 개인의 행보에 대해서는 좀 더 사료에 근거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보충해서 자료를 읽어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뿐 아니라 현양사의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천우협과 동학당 사이의 연계 관계도 상당히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천우협은 전봉준과 이용구 등의 동학당 간부와 결의하여 폭탄과 무기를 제공하는 등 협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 같다. 재미있게도 천우협 역시 동학 토벌에 나선 일본군에 의해 쫓겨다녔다고 하는데, 천우협과 동학 관계에 관련하여 국내 저자의 논문이 있다면 국내 저자의 관점에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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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승만 정권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상당히 단순한 평가가 이루어지곤 한다. 삼백산업을 중심으로 소비재 산업을 육성하고, 내수를 지향하는 수입대체 산업화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이 바로 그 것이다. 보통 이러한 평가는 박정희 정권의 수출주도산업화와 비교하기 위한 것으로, 이승만 정권의 '실패한' 수입대체 산업화와 박정희 정권의 성공한 수출주도산업화를 비교하여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이 가졌던 현실적 강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이러한 단순 비교적 인식은 보수 경제학자들 뿐 아니라, 이른바 진보 진영의 경제학자들 역시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이승만 정권의 경제 정책은 단지 박정희식 경제 개발에 대한 찬반 논리에 대한 전사前史로 축소되고 만다.

그러나 정진아는 이 논문을 통하여 이승만 정권이 추구하던 경제정책을 '자립경제론'으로 정리하고, 이승만 정권이 가졌던 문제 의식과 이후 남한 자본주의 경제 건설의 상관 관계를 논증하며 이미 이승만 정권기에 남한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방향이 성립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작업은 이제까지의 한국 경제사가 "박정희 시기의 군부 개발 독재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냐" 라는 좁은 프레임 안에서 진행되었던 것을 넘어서는 의미있는 문제 제기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일부 진보파 경제학 내부에서도 쉽게 빠지게 되는 함정인 '민족자립경제'라는 것이 기원적으로 어떤 문제를 내재하고 있는지 살필 수 있을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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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리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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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의 기본 이데올로기가 '반공'이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 '반공'의 내용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가? 단지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외침이 전부였는가? 오늘날 한국 근현대사를 놓고 '건국'을 중요시하는 뉴라이트 진영과 '민족'을 중요시하는 개혁 진영의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과연 그 것은 실제로 어떤 역사적 실체를 밝히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는가? 후지이 다케시는 이승만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단지 '반공'에 그쳤던 것인지 재조명해보는 이 논문을 통하여 단지 정당 정치적 다툼의 후방 지원에 불과한 오늘 날 한국 현대사 논쟁이 얼마나 텅 빈 것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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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션과 미학> 1부에 해당하는 '서설 : 네이션과 미학'을 다룬 글입니다. 제가 봤을 때 고진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퍼즐맞추기와도 같은 재미를 주는데 그의 저서들은 어떤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부분에서 변주됩니다. 물론 퍼즐을 맞추려면 퍼즐 조각이 있어야겠죠? 고진의 가장 큰 퍼즐 조각은 칸트와 맑스입니다. 그리고 헤겔, 프로이트와 같은 (상대적으로) 작은 퍼즐 조각들이 있겠죠. 만만치 않은 퍼즐 조각들인데, 고진은 퍼즐을 맞추기에 앞서 먼저 퍼즐 조각들이 어떤 모양인지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그 것이 고진 읽기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싶은데, 칸트와 맑스, 헤겔과 프로이트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고진의) 칸트, 맑스, 헤겔, 프로이트를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괄호에 넣은 '(고진의)'를 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어쨌든 가라타니 고진은 그 누구보다도 친절한 'The Reader - 1차 텍스트 읽어주는 남자'인 셈이고, 그 점이 고진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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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리스티


8. 책임의 네 가지 구별과 근본적 형이상학성


2차 대전 후 독일에서 전후 범죄 처리를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릴 무렵, 칼 야스퍼스는 <죄책론>이라는 강연을 했다. 전후 책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는 많았지만, 결국 그 것이 어떤 '인식'으로 까지 향하지 않았던 일본과 비교해볼 수 있겠다. 아무튼 여기서 야스퍼스는 '전쟁의 죄'를 네 가지 차원으로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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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리스티

<윤리21>은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론을 일본 사회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 논증하는 책이다. <윤리21>의 문제 의식은 이후 <트랜스크리틱>의 1부를 통해서 이론화되는데, <윤리21>의 부록으로 <트랜스크리틱> 1부가 수록되어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미 그 시점에서 <트랜스크리틱> 1부의 골격이 잡혀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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