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05 02:11 공동생활전선
공동생활전선에 대한 의문들
역시 박가분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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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번에 휴가를 나올 때 L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도서출판b에서 번역을 하는 분인데, 개인적으로 저 자신에게는 분석가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저 자신이 이론적으로 막혀 있다는 느낌이 들어, 조언을 구하고 싶은 심정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 사람의 독특한 언행과 정신세계에 매혹되어 있었던 것도 작용해서 만나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주체의 윤리"라는 최근의 논문에서(다음 카페 <비평고원>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주체"에 관한 심도 있는 이론적인 천착을 보여 준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최근의 고민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후기 자본주의적 폐색을 돌파할, "주체"는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서 그 동안 L님의 이론적 여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요. 여기에 대한 이런 저런 질문들을 안고서, 다시금 출판사 세미나실에서 조촐한 분석(?)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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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뤄진 두서 없는 잡담들은 거두절미하고,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공동생활전선에 관한 화제로 이야기를 한정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L님이 "공동생활전선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읽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상당한 명문"이라고 칭찬을 했고, 이런 고민을 하는 젊은이들이 대학에 그리 많지 않다는 현실에 대해 개탄했지요. 뭐 이런 반응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여기저기서 많이 소문과 관심이 일고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L님은 그 기획에 대한 몇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서 소개했다시피 L님도 "후기 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폐색을 넘어설 주체성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공유하고 있고, 그에 따라 주체가 떠맡아야 할 "윤리"와 "책임"에 대해 대단히 진지하게 사고하고 있었지만, 그는 "공동생활전선"이라는 아이디어와 불일치하는 몇 가지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제가 L님의 진짜 입장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그의 입장을 듣고 나서 뜨악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L님은 일단은 "공동체"를 통해 무언가에(그것이 신자유주의이든, 후기 자본주의이든, 시장독재든 무엇이든) "맞선다"는 아이디어 자체에 유감을 표시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여전히 옛날의 공동체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이상 그와 같은 "공동체"가 성공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게다가 그는 "공동체"라는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유의 방식들이 철학자와 이론가들에게 뿌리뽑기 힘든 악습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에게는, "공동체"를 오히려 적대하는 사유의 방식과 모델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것이 자신의 이론적 목표인 것입니다. 그가 가라타니 고진의 "연맹" 혹은 "어소시에이션"에 주목한 것은 바로 이런 이론적 관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논리에 맞선 "연맹"의 논리를 정립하는 것이 그의 주 관심사이며, 그러한 대립구도 속에서 그가 "주체의 윤리"를 사고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에 속한 주체와 "연맹"에 속한 주체 간에는 분명한 위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위상의 차이가 어떻게 윤리적인 차이를 획득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L님에게는, "진정한 윤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연맹에서 나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맹과 공동체의 진정한 차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오는데, 이것을 대상a라는 범주를 통해 고찰되어야 한다고 이야기되었습니다. 즉 공동체에는, 숱한 사회정치철학자들이 이야기했듯이, "공동"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를 지탱하는 주체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바로 그 주체들의 공동성 자체를 표상하는 공동체의 "중심"을 필요로 합니다. 민주주의는 기표의 자율성을 통해 바로 그러한 "중심"을 비워낸 새로운 공동체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업을 통해 이야기하지만 공동체를 실제로 지탱하는 온갖 사회적 기능들과 별개로, 그러한 사회적 기능들을 상징적으로 통합하는 데 전문적으로 특화된 직업군이 존재합니다. 국회의원, 판검사,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는 기타 등등. 그런데 이들이 실제로 사회에 유용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직업군이 사회의 상층부에 군림하며, 사회지도층이라는 대접을 받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대상a"에 대한 권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오늘날 그러한 대상a를 상징적으로 비워내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의기양양해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상과 기표의 분리가 더 철저히 이뤄질수록 공동체의 모델은 여전히 뿌리뽑기 힘든 강력한 것으로 자리잡게 되어 갑니다. 앞서 말한 사회지도적 직업군은 분명히 잉여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잉여적인 바로 그만큼, 그들이 선거로 선출되었든 타고났든, 그들은 사회적 행위자와 직업군들을 묶어내는 보편적인 틀로 기능을 합니다. 오늘날에는 공동체의 공동체성을 표상하는 무언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흔히들 떠들어댑니다만, 사실 이것은 "공동체"의 논리입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나오는 모델은 민주주의 사회인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연맹은 철저히 분업의 논리 위에 기초한 것이며, 각자의 단독적이고 특수한 소상공인 어소시에이션이 그들을 묶는 잉여적인 대상에 대한 요청 없이도 충분히 연맹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결속의 모델입니다. 그런데 "분업"의 환원불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바로 그 분업을 묶는 잉여적인 대상a를 통해 공동체를 표상하는 오래된 관습에서 맑스조차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바로 이 관습이 여전히 남아 있어, 이론가들이 사회적 봉기를 일궈낼 이론적 책임 따위의 말을 하는 게 아닐까요?
오늘날 "진보적인" 이론가들조차 자신을 단독적이고 고유한 하나의 직업가(L님에게는 "출판"과 "번역" 등과 같은 이러한 직업적인 고유성에서 소명과 책임을 발견하는 게, 일전에 게슴츠레님이 말한 "봉기의 이론"(주인기표)을 정립하려는 이론적 열망보다 더 중요합니다)로 보기를 꺼리고, 사회의 보편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특수성에 연연해 하지 않는 보편성의 자리(주인기표)를 (그것이 얼마나 탈구되어 있든 간에 ) 차지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대상a에 대한 지식이나 권위를 가진 위치(주인기표)에 놓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이론적 욕망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고 성민씨는 말합니다. 그러한 자리는 오히려 잘 훈련된 "분석가"가 차지해야합니다. 분석가는 대상a의 자리에서 주체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지워내야만 합니다. 그는 대상a를 공동체의 공동체성을 표상하는 기능으로부터 최초로 분리시키는 행위자입니다. 대상a가 더 이상 공동체의 어떤 대의도 표상하지 못할 때, 주체는 그것을 통해 다른 윤리를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심지어 공동체 자체를 위기에 몰아넣고 파국을 불러일으킨다고 해도 말입니다.
말하자면 주인기표가 지시하고 있는 타자 안의 '공동'에 개입하는 자신의 방법을 찾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윤리적'인 도전인 이유는, 이것이 '공동체를 구한다'는 도착적 열망 없이, 공동(공공)의 이해에 기여하는 나름의 개입의 방법들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단독적 주체의 위치에 섬으로써, 곧바로 어떤 사회적-공동체적 매개 없이 바로 보편적 위치에 선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또한 이것은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을 수립하는 첫걸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대상a의 위치에 자신을 놓으려는 이론적 욕망('봉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구체적인 분석을 내놓는다는 따위의 말장난)들은 사실은 사회적이고 참여적인 열망이 강렬한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의 문제를 철저하게 극복하지 못한 병리성을 지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학생운동에 대해 지금까지의 논의들은 어떤 시사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L님은 학생운동가들이 오히려 학교를 나와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더 고민해야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예컨대 운동의 각종 분파들 내부에서는 어떤 '지주'와 같은 존재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들이 학교에 오래 붙어 있다가 일단 나가고 나면, 운동의 기획들이 흐지부지되는 경우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체"라는 것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예증합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 흐지부지될 것이라면 과감하게 학교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L님은 역시 공동새활전선 역시 하나의 '공동체'가 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를 던진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공동체라면 반드시 그것의 공동성을 유지해야한다는 강박을 안게 되고, 결국 누군가가 그러한 공동성을 표상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만두게 되면 이 모든 것이 흐지부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 공동성을 유지해야한다는 강박 자체를 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여기서 L님은 흥미롭게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쟁점을 꺼내들었습니다. 첫번째는 연애의 문제입니다. 지난번 휴가에 나와서, 잠시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것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연애에서 잘못된 구원을 바라고 있다, 오히려 연애에 대한 제약을 충분히 받아들여야, 연애에 대한 환상을 극복할 수 있지 않느냐는 요지였습니다.
1. 연애의 문제
하지만 L님은 오히려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연애"가 필수불가결하다고까지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이론적-학문적 욕망을 가진 주체들이 쓸데 없는 고민들을 버리기 위해는, 오히려 "연애"를 해야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연애를 통해 대부분의 부차적인 의문들이 해소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연애를 버려야 한다는 논리에 대해 굉장히 질색해 하면서, 지젝을 인용하더군요. 지젝이 언젠가 그런 말을 했다는데, 혁명적 대의와 사랑에 대한 고전적인 대립들은 두 가지 결말을 가지고 있다. 대의와 사랑 모두에 실패하느냐, 아니면 대의와 사랑을 모두 성취할 것이냐. 우리는 대의 뿐만이 아니라 사랑을 과감하게 선택을 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공동체의 공동성, 내지는 심지어 '연대의 가치'를 훼손하는 한이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한 사랑받을 책임을 지는 한에서, 그리고 그것이 "가족"이나 "공동체"의 기능에 종속되지 않는 한에서, 그것이 그 사람을 주체의 위치에서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주거의 문제
그리고 L님은 다 함께 "같이 산다"는 게, 결국은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논리와 다를 게 뭐냐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심지어 "비용"이 문제가 된다면 모두가 같이가 아니라, 연인과의 동거라는 방법이 더 좋지 않겠냐고 말이지요. 그래서 오히려 저는 처음에 "모두가 같이"라는 생각을 했을 때, 그것을 일종의 키부츠와 같은 소-공동체와 같은 모델로 생각을 했던 게 아닌가 반성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같이 산다는 주거 형태가 될 때 한 주거단위가 정말로 이해가 일치하는 최소한 2~3명의 인원으로 유지되고, 또 다른 공동생활전선 참여자들은 다른 곳에서 주거지를 마련하는 등, 좀 더 잘게 분할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에 대한 주석에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는 단순한 노동대중과 달리,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떨어져 있어도 여전히 서로를 신뢰할 수 있다면 말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시사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무튼 L님의 요지는, "가출"을 해야한다는 요지는 동감하고, 그 의의에 대해 잘 포착했다고 보지만, 그것이 반드시 "공동생활"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젊은이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들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발적인 "공동생활"이라는 삶의 형태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또한 '전선'을 이뤄야 한다는 요청을 L님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심도 듭니다. 공동생활이라는 게 하나의 유사-키부츠로 전락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삶의 형태들 간의 '연맹'을 이룰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 점에 대한 고민이, 공동생활전선을 고민하는 우리들 사이에서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듭니다. 오히려 공동체 없는 보편적 연대라는 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줘야하지 않을까요? 사실 이번 휴가를 나올 때 부모님에게 공동생활전선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 꺼냈는데, 그것이 결국은 진정한 신앙생활을 실현해본다고, 공동생활을 시도하다가 이단으로 빠진 무수한 사례들과 뭐가 다르냐는 반문이 돌아왔습니다. 물론 그 취지를 부모님이 오해한 감도 없지 않지만, 분명 공동생활전선에 관해서 시사점이 있는 지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언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해 뭉쳐야한다고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것이 뭉치기 위해 뭉치는 게 되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분명 공동생활전선에 어떤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말했듯이, 연애에 관해 좀 더 고민을 해봐야 하고, 또 남녀간에 같이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공동생활이라는 프레임 자체가 좀더 세분화되어서 쪼개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건 사족입니다만, 제가 여기서 L님의 모든 입장에 찬동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저는 당시 성민님의 언변에 매혹되었지만, 사실 그의 입장이 저 진부한 '아나코-생디칼리즘'의 입장과 뭐가 다르냐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애초에 지젝이 말한 '대의'라든지 심지어 고진이 말한 칸트의 '규제적 이념'이라든지 하는 것조차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다면 과연 주체가 어떻게 자신을 둘러싼 교착상태를 돌파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공동생활전선에는, 그것이 아무리 자율적인 삶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 중심이 되는 '대의'와 규율이 필요하며,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없다면 결국 조합주의적 관점으로 퇴행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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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고진의 '어소시에이션'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확실히 확 와닿는 이야기가 많군요.
일단 공동생활전선의 문제에 집중해서, 저는 공동생활전선이 일단 '공동체'이냐 '연맹'이냐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처음 공동생활전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공동체'라기 보다 단일한 목적을 공유하는 '따로 또 같이'가 되어야한다고, 또. 개개인이 다른 활동에 종사하면서, 공동생활을 통하여 목적을 향한 규율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저는 확실하게 (L님의 용어로 말하자면) '공동체' 보다는 '연맹'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고려가 '선언'에서 이야기되지 않은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H님 역시 "다양한 공동체들이 하나의 전선을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죠. 그 '전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것은 "따로 또 같이 꿈틀대는 공동체, 개인, 크고 작은 운동들"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 것이야 말로 '연맹'이 아니고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다만 M님이 여기에 대해 "우리의 논의는 '공동체들'에 대한 논의가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공동체'에 대한 논의가 되어야 할까요?"라고 질문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 고민이 미진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바로 L님의 지적(연맹!) 때문에 오히려 공동생활 자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대의'라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윤리적 주체'가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고진 역시 '윤리적 의무'를 이야기했듯이요. 그리고 바로 그렇게 이야기할 때 "대의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개인이 온전히 윤리적 주체로 우뚝 설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대의'라는 것을 적대하는 세상에서, 그리고 남겨진 것은 대의의 흔적 뿐인 상황에서 대의를 탐색하고, 윤리적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공동생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애의 문제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연애를 '제한'하자고 말할 때 그 것은 '소비적 연애'로 보아야겠죠. 연애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적 삶과 공적 삶을 구별하자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날 우리들은 소비적 연애를 통해 삶 자체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태어 '연애에 맹목되지 않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꼭 연애를 해야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려 어떻게든 들이대는 행위가 있죠. 소개팅을 구걸하는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이들이 진보적인 학생들 사이에서도 생각보다 적지 않습니다. 자기계발에 철저한 이들은 오히려 이 것을 경멸하지 않던가요?
그런데 연애를 하는데 공동생활을 함께 하려면 이 것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 의 문제에 대해서 확실히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다. 저는 사적 시간과 공적(?) 시간을 구분해야 한다고 보는데요, 사적 시간에 연애를 하든 공부를 하든 그 것은 자신의 마음이겠지요. 사실, 통금이 엄격하고, 게다가 집이 멀리 떨어진 불행한 커플들은 원래부터 밤 몇 시 이후에는 서로 만나지 못하지 않나요...
주거의 문제는, 전면적으로 '금액' 에 따라 결정될 것 같습니다. 저도 가능하다면 2~3명씩을 단위로 '근거리'로 나뉘어 생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면 연인과의 동거도 가능하겠죠. 그런데 이 것이 경제적 자율성이라는 목표와 충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5~6인을 이야기할 때는, 어디까지나 금액 상 그 것이 좋지 않겠느냐, 구요. 시트콤 <프렌즈>처럼 개인 영역이 확연히 구별하는 공간이 있다면야 좋겠습니다만, 결국 '돈'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구체적인 생활의 방법 역시 문건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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